AI 에이전트의 과잉 확신, 디지털 자아의 함정

상담실에서 한 내담자가 이런 말을 했다. “AI로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저보다 훨씬 저를 잘 설명하더라고요. 근데 그게 저 같지 않아서 계속 불안했어요.” 처음에는 그냥 겸손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비슷한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이메일 작성, SNS 포스팅, 심지어 본인 의견을 AI에게 대신 정리하게 했더니 — 실제 나보다 훨씬 확신에 차 있어서 오히려 낯설다는 것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말하면, 이건 단순한 겸손이 아니다. 뭔가 중요한 걸 짚고 있는 감각이다.

AI가 당신보다 더 ‘당신답게’ 말하는 이유

최근 X(트위터) 이용자 1,000명 이상의 게시물을 기반으로 AI 에이전트를 만든 연구가 있다. 연구팀은 각 사람의 과거 포스팅을 학습시켜 정치적 콘텐츠에 어떻게 반응할지 시뮬레이션했다. 더 많은 데이터를 줄수록 더 정확하게 그 사람을 모방할 거라고 기대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데이터를 많이 줄수록 AI는 그 사람을 더 정확하게 재현한 게 아니라 더 강하게 과장했다. 연구팀은 이를 “생성적 과장(generative exaggeration)”이라고 불렀다 — 원래 사람에게서 관찰된 것보다 이념적 특성을 더 증폭시킨다는 뜻이다. 약한 의견이 강한 신념으로, 조용한 선호가 뚜렷한 입장으로 바뀐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형 언어 모델은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압축한다. 내가 80%의 확률로 A를 선택했다면, AI는 그냥 A를 선택한다. 그 20%의 망설임이 모델링 과정에서 조용히 지워지는 것이다.

망설임이 사라진다는 것의 무게

심리학에서는 불확실성 감내 능력(tolerance of ambiguity)을 성숙한 판단의 핵심 지표로 본다. 좋은 판단이란 확신 있게 결론을 내리는 게 아니라, 모순된 정보를 붙들고 있을 수 있는 능력이다.

사람이 망설이는 건 약한 게 아니다. 새로운 정보가 오면 입장을 수정하고, 반론을 들으면 잠깐 흔들리고, 결과를 보면서 판단을 업데이트하는 것 — 이 일련의 과정이 실은 더 정교한 인지 작업이다.

혁신 이론가 John Nosta는 이를 ‘안티인텔리전스(anti-intelligence)’ 개념으로 설명한다. 인간의 지능은 실제 세계의 결과에 연결되어 있다. 틀린 말을 하면 신뢰를 잃고, 무책임한 발언에는 사회적 비용이 따른다. AI 에이전트는 이 부담 없이 가장 확신에 찬 버전의 당신을 제시할 수 있다.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으니까.

근데 여기서 재밌는 게 있다. 상담실에서 보면, 망설임 없이 확신에 찬 사람이 항상 더 건강한 게 아니다. 진짜 심리적 성숙은 오히려 ‘나는 모를 수도 있다’를 받아들이는 데서 온다. AI는 그 여지를 지워버린다.

‘더 확신에 찬 나’와 함께 살아가는 법

문제는 이게 처음에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는 거다.

AI가 나 대신 이메일을 쓰고, 의견을 정리하고, 협상을 대리한다고 생각해보자. 그 버전의 나는 훨씬 매끄럽다. 망설임도 없고, 어색한 침묵도 없고, 핵심만 말한다. “오, 이게 더 잘 표현된 것 같은데?” 싶을 수 있다.

근데 세련된 AI 버전에 반복해서 노출되다 보면, 실제 나의 불확실함과 주저함이 비효율처럼 느껴지기 시작할 수 있다. 이걸 ‘보정 이탈(calibration drift)’이라고 부른다. AI의 매끄러운 목소리가 새로운 ‘정상’이 되면서, 인간적 마찰이 결함처럼 보이는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상적 자아(ideal self)와 실제 자아(actual self) 간의 간극이 클수록 자기 수용이 어려워진다는 건 꽤 잘 알려진 사실이다. AI가 만들어낸 ‘더 나은 버전의 나’를 계속 기준으로 삼게 되면, 진짜 나는 늘 부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더 말하고 싶지만 꾹 참겠다.)

AI와 인간 정체성
이미지 출처: Psychology Today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1. AI가 대신 쓴 글에서 한 군데만 나의 말투로 되돌리기

AI가 작성한 결과물을 그대로 쓰기 전에, 한 부분만 내 표현으로 수정해보는 것이다. 망설임을 포함시켜도 된다. “어쩌면”, “잘 모르겠지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 이런 표현이 들어가면 오히려 더 진짜처럼 읽힌다.

2. ‘AI 버전의 나’가 나보다 강해 보일 때 잠깐 멈추기

AI가 정리한 내 의견이 실제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면, 그 차이를 메모해두자. 그게 AI의 과장인지, 아니면 내가 억누른 진짜 생각인지 — 구별하는 게 생각보다 중요하다.

AI를 잘 쓰는 것과 AI에게 나를 내주는 건 다르다. 에이전트는 내 통계적 패턴을 복사할 수 있어도, 내 망설임의 역사는 복사하지 못한다. 그 망설임이 때로는 나의 가장 인간적인 부분일 수 있다. 마침 AI가 점점 더 나를 닮아가는 시대니까, 지금이야말로 ‘덜 세련된 나’를 한 번쯤 의도적으로 지켜볼 타이밍일지도.

이수진

심리연구소에서 심리상담사 겸 콘텐츠 마케터로 일한다. 가끔 코딩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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