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이 무기력한 직장인, 번아웃 아닌 진짜 정체

야근도 아니었다. 주말 내내 쉬었고 잠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월요일 아침, 지하철에서 회사 건물이 보이는 순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텅 빈 것 같은 느낌. 지친 게 아니라 뭔가 사라진 것 같은 감각. 수요일 회의에서 평소 같으면 웃고 넘겼을 말이 이상하게 오래 마음에 걸렸다. 이런 순간들, 설명이 어렵지 않나?

“나도 번아웃이 온 건가?” 대부분이 그렇게 이름 붙인다. 근데 심리학에서는 이걸 다른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

번아웃인 줄 알았는데, 사실 이름이 따로 있었다

직장 변화를 겪는 직장인 약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3명 중 1명이 직장 변화로 인한 ‘상실감(grief)’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이다.

Grief. 보통 소중한 사람을 잃었을 때 쓰는 단어다. 근데 그 감정이 지금 사무실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사실 당연하다. AI 도입으로 몇 년간 쌓아온 기술이 하루아침에 구식이 됐다. 팀원이 권고사직을 받고 짐을 쌌다. 같이 밥 먹고 웃던 팀 분위기가 어느새 사라졌다. 옆자리 현우가 떠난 뒤부터 회의실이 이상하게 조용해졌다. 몸은 그대로 회사에 있는데, 뭔가를 잃었다는 감각은 분명하다.

번아웃은 과로로 에너지가 소진된 상태다. 상실감은 다르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이다. 같아 보여도 뿌리가 다르면 처방도 달라진다. 아무리 쉬어도 공허함이 가시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순간 달라지는 것

심리학에서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행위를 ‘affect labeling(감정 명명)’이라고 부른다. 뇌과학 연구에서 반복 확인된 사실인데, 이름을 붙이는 것만으로 신경계가 처리를 시작한다. 감정을 이겨내려 할 때보다, 이름을 붙이고 인정할 때 오히려 덜 휩쓸린다는 거다. 억눌려 있던 게 비로소 흐르기 시작한다.

반대로 이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1973년부터 전 세계 조직을 컨설팅해온 Margaret Wheatley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표현된 슬픔은 에너지를 방출하고 연결을 열어준다. 억압된 슬픔은 복합된다.”

억압이 반복되면 grief는 훨씬 다루기 어려운 무언가가 된다. 상담실에서 진짜 자주 보는 패턴이다. “나는 왜 이렇게 예민하지?”, “이 정도 가지고 왜 힘들어하지?” 하고 자책하는 사람들. 그 아래에 이름 붙이지 못한 상실감이 쌓여 있는 경우가 많다(더 말하고 싶지만 꾹 참겠다).

말하지 않은 슬픔이 쌓이면 생기는 일

이 연구에서 더 주목할 만한 발견이 있었다. grief가 gratitude(감사함)를 앞질러가는 순간, 사람들은 단순히 힘든 상태에서 무너지는 상태로 넘어간다는 거다.

처음엔 “그래도 직장은 있으니까”, “동료들이 좋으니까”라며 버틴다. 그런데 잃어버린 것들이 계속 쌓이면 감사함이 희미해진다. 그 임계점을 넘으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해진다.

리더 눈에는 팀원의 무기력이나 저항처럼 보이는 것들. Wheatley 박사는 이렇게 짚었다. “그게 태도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아무도 이름 붙일 허락을 주지 않은 grief일 가능성이 있다.” 억눌린 감정은 결국 냉소와 이탈로 드러난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연구팀이 제안하는 실천은 작다. 그래서 오히려 할 수 있다.

나 혼자: 노트에 이것만 써보자. “지금 직장에서 내가 잃은 것, 또는 잃을까 봐 두려운 것은?” 답을 완성하는 게 아니라 질문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신경계는 다르게 반응한다.

팀과 함께: 회의 시작 때 두 가지 질문을 꺼내보자. “우리가 지금 놓기 어려운 게 뭘까?” 그리고 “이 변화에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면?” 각자 두 문장씩만.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그냥 들어주면 된다.

리더라면: 변화를 공지할 때 손실을 먼저 인정해보자. “이 변화가 우리가 소중히 여겼던 것들을 잃는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고 싶었습니다.” 비용은 0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느끼는 안전감은 달라진다.

grief와 gratitude는 반대말이 아니다. 둘을 동시에 품는 것이 가능하고, 그게 오히려 건강한 상태다. 변화 속에서도 버티는 사람들은 슬픔이 없는 게 아니라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알고 있는 거다.

이유 없이 무기력했다면, 오늘 그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자. 그것만으로 충분히 시작이다.

이수진

심리연구소에서 심리상담사 겸 콘텐츠 마케터로 일한다. 가끔 코딩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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