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근보다 이게 더 스트레스인 이유, 75만 명이 밝혔다

상황 두 가지를 비교해보자.

상황 A: 팀장이 “이번 주 팀빌딩 행사 기획 좀 맡아줄래?”라고 한다. 가벼운 부탁처럼 들린다. 근데 뭘 해야 하는지, 예산은 얼마인지, 팀장이 원하는 방향은 뭔지…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상황 B: 팀장이 급하게 달려와 “중요 거래처에서 A, B, C 자료 내일 아침까지 달라고 해. 빡세겠지만 부탁해”라고 한다. 야근 확정이다. 근데 뭘 해야 하는지는 완벽히 명확하다.

어느 쪽이 더 스트레스스러울까. 대부분은 상황 B라고 답할 거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근데 심리학은 완전히 다른 말을 한다.

야근을 해도 버티는데, 방향 없는 업무에 무너지는 이유

심리학자 Adam Grant가 최근 링크드인에 올린 글이 화제가 됐다.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할 일이 너무 많은 것만큼 스트레스를 준다.”

“그게 말이 돼?” 싶지 않나. 나도 처음엔 그랬다.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이건 그냥 개인 의견이 아니다. 500개 이상의 연구와 75만 명이 넘는 데이터를 분석한 메타연구가 뒷받침하는 결론이다.

Grant가 그 연구를 인용하며 내린 결론은 충격적이다. 역할이 불명확하거나 서로 충돌하는 상황이, 단순히 할 일이 너무 많은 상황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우리의 성과와 웰빙을 망가뜨린다.

60년치 데이터가 같은 말을 하고 있다는 거다.

심리학에서는 이걸 ‘역할 모호성’이라고 부른다

직무 스트레스 연구들은 직장 스트레스 원인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눈다.

  • 역할 모호성(Role Ambiguity):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상태
  • 역할 충돌(Role Conflict): “A도 하라고 하고 B도 하라고 하는데 둘이 충돌한다”는 상태
  • 역할 과부하(Role Overload): 할 일이 물리적으로 너무 많은 상태

상담실에서 진짜 자주 듣는 말이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지쳐 죽겠는데, 정작 오늘 뭘 했는지 모르겠어요.” 이 분들에게서 공통으로 보이는 게 바로 역할 모호성이다.

왜 방향 없는 업무가 더 힘들까. 야근은 고되지만 끝이 있다. “이거 하면 된다”는 방향이 있다. 뇌가 에너지를 어디다 쏟을지 알고 있다. 근데 방향이 없으면? 뇌는 쉬지 않고 경계 상태를 유지한다. “뭘 해야 하지? 이게 맞나? 저거도 해야 하나?” 이 끝없는 내면의 루프가 실제로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뇌과학적으로도 이유가 있다. 불확실성은 뇌에서 위협 신호로 처리된다. 편도체가 활성화되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이 분비되고, 집중력이 바닥난다. 명확한 마감이 있는 야근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모호함이 뇌를 더 오래, 더 깊이 소모시키는 거다.

75만 명 데이터가 밝혀낸 직장 스트레스의 진짜 정체

우리의 직관은 이렇게 생각한다. 업무량이 많을수록 스트레스가 크다고. 합리적으로 들린다. 근데 데이터는 다른 순서를 보여줬다.

방향 없는 업무(역할 모호성) ≥ 할 일 폭탄(역할 과부하)

사실 이건 인간의 본능과도 맞닿아 있다. 어려운 일은 힘들지만 적어도 명확하다. 반면 열린 결말의 불분명한 업무는 그 불확실성 자체가 심리적 부담으로 쌓인다.

“할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든 거겠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라면, 진짜 문제는 ‘방향 없음’일 수 있다. 이 차이를 아는 것만으로도 접근법이 완전히 달라진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역할 모호성은 혼자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지만, 작은 질문 하나가 생각보다 많은 걸 바꾼다.

1. “이 업무의 기대 결과물이 뭔가요?” 팀장이나 동료에게 직접 묻는 것만으로 역할 모호성이 크게 줄어든다. 이건 멍청해 보이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명확한 기준을 세우는 태도다.

2. “A와 B 중 어떤 게 먼저인가요?” 서로 충돌하는 업무가 동시에 들어올 때, 침묵으로 버티는 것보다 우선순위를 조율하는 게 낫다. 말하기 불편하더라도, 버티는 쪽이 결국 더 불편해진다. (제발.)

3. “지금 힘든 게 일이 많아서인가, 방향이 없어서인가?” 원인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인다. 일이 많아서라면 우선순위 문제고, 방향이 없어서라면 명확화 문제다. 해결책이 완전히 달라진다.

야근이 힘든 건 맞다. 근데 더 은밀하게 우리를 지치게 만드는 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다. 60년치 연구가, 75만 명의 데이터가 이미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 퇴근 전에 딱 하나만 물어보자. “이 업무, 어떤 결과가 나오면 잘 한 건가요?” 이 한 마디가 내일 하루를 다르게 만들 수 있다. 마침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일지도.

이수진

심리연구소에서 심리상담사 겸 콘텐츠 마케터로 일한다. 가끔 코딩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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