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면 번아웃 없다는 착각, 심리학이 밝힌 고성과자의 함정

목표를 항상 달성하고, 마감을 절대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 이런 사람은 번아웃이 없을 것 같다. 오히려 가장 탄탄한 정신력을 가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런데 심리학 연구는 정반대를 말한다. 일 잘하는 사람이 번아웃을 가장 늦게 알아채고, 가장 오래 방치한다.

일 잘한다는 이유로 오히려 소외되는 사람들

고성과자는 조직에서 가장 방치되는 직원이다. 이게 단순한 표현이 아니다. 전문가들이 반복적으로 지적하는 현상이다. 성과를 내는 사람에게 조직은 “저 사람은 괜찮다”고 판단한다. 일이 잘 돌아가고 있으니까. 그래서 지원이 필요한 사람,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 사람 목록에서 가장 먼저 빠진다.

여기에 개인 차원의 문제까지 겹친다. 스스로도 “나는 아직 해내고 있잖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상태를 솔직하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만성 피로, 감정 마비, 퇴근 후에도 머릿속에서 일이 꺼지지 않는 것. 이 모든 게 번아웃의 신호인데,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라고 치부하고 넘어간다.

CDC가 2,600명 이상의 의료 종사자를 분석한 연구에서 이 패턴이 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4명 중 1명이 심각한 심리적 고통 기준을 충족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원을 요청한 사람은 40%도 안 됐다. 더 충격적인 건, 5명 중 1명은 “나는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임상 기준으로 명백히 심각한 상태인데도.

심리학에서는 이걸 ‘스마일링 디프레션’이라고 부른다

심리학에는 이 현상을 설명하는 용어가 있다. ‘스마일링 디프레션(smiling depression)’이다. 겉으로는 멀쩡히 기능하고 심지어 밝아 보이지만, 내부에서는 심각한 심리적 고통이 쌓이고 있는 상태다. 최근 연구는 고성과자에게 이 패턴이 특히 자주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겉으로 보이는 유능함이 내부 상태를 가린다. 타인에게도, 자신에게도.

상담실에서 진짜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저는 그래도 일은 하고 있거든요.” 이게 문제다. 일이 잘 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에게 “나는 번아웃이 아니다”라는 증거처럼 작동한다.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Frontiers in Psychiatry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아직 기능하고 있는 직원에서도 번아웃과 연관된 인지 저하, 우울, 불안이 예측됐다. 눈에 보이기 훨씬 전부터 내부에서는 이미 쌓이고 있다는 거다.

이걸 임원 코치 Kenny Stoddart는 이렇게 표현했다. “고성과라는 것 자체가 ‘아무 문제 없다’는 믿음을 강화한다. 내부에서 부하가 쌓이는 동안에도.” (읽고 나서 입을 틀어막았다. 너무 정확해서.)

지금 내가 위험 지대에 있다는 신호

번아웃을 놓치는 이유가 “일을 잘하고 있어서”라면, 어디서 신호를 찾아야 할까. 성과가 아닌 에너지와 회복에서 찾아야 한다.

아래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봐라.

  • 주말이나 연휴에 쉬어도 월요일 아침이 여전히 무거운가?
  • 퇴근 후에도, 지하철 안에서도 일 생각이 멈추지 않는가?
  • 잘 해내고 있는데도 왠지 공허하거나, 의미가 안 느껴지는가?
  • 사소한 일에 과하게 무너지거나 짜증이 치솟는가?

2개 이상 해당된다면, 겉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전의 증거가 아닐 수 있다. 회복 없이 계속되는 고성과는 회복력이 아니라, 아직 표면에 드러나지 않은 소진이다. 일을 잘 해내고 있다는 것은 내가 괜찮다는 뜻이 아니라, 압박이 아직 임계점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뜻일 수도 있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크게 바꾸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 당장 작게 시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떻게 지내?”가 아니라 “요즘 버티는 중이야?”라고 물어봐라 나 자신에게, 또는 가까운 동료에게. 성과 중심의 질문 대신 에너지 중심의 질문으로 바꾸는 것이 첫 번째다. 고성과자를 위한 접근법에서도 이걸 핵심으로 꼽는다. “일이 어떻게 돼가?”가 아니라 “일 아래에서 어떻게 버티고 있어?”

쉬기 위한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번아웃을 예방하는 가장 실용적인 방법 중 하나는, 쉬어야 하는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 것이다. “이것만 끝내고 쉬어야지”가 반복되는 구조는 무너지도록 설계된 구조다.

“나는 성과를 내는 사람”과 “나”를 분리해봐라 지금까지 이룬 것을 모두 지웠을 때, 그래도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게 바로 신호다. 정체성이 성과와 완전히 융합됐을 때, 조금의 실수도 붕괴처럼 느껴지게 된다.

이럴 땐 전문가와 함께

지쳐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아직 괜찮아”라는 생각이 계속 든다면, 그 자체가 전문 상담을 고려해볼 신호일 수 있다. 특히 감정이 마비된 것 같거나, 예전엔 즐거웠던 것들이 더 이상 즐겁지 않거나, 하루하루를 버티는 느낌이 든다면 심리상담사나 정신건강 전문가와 이야기해보는 것을 권한다.

잘 기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로 괜찮은 것은 다르다. 그 간극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사람이 나 자신이어야 한다. 마침 오늘 이 글을 읽었다면, 잠깐이라도 그 간극을 들여다볼 완벽한 타이밍일지도.

Photo by Nataliya Vaitkevich on Pexels

이수진

심리연구소에서 심리상담사 겸 콘텐츠 마케터로 일한다. 가끔 코딩도 하고.

댓글 남기기

※ 본 글에 사용한 모든 이미지는 별도 표시가 없으면 Freepik에서 가져온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