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35,000번의 선택이 저녁 에너지를 갉아먹는다

미국 성인은 하루 평균 35,000번의 결정을 내린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처음 봤을 때 저도 반신반의했습니다. 35,000번이면 초당 두 번꼴인데, 그게 가능한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가능한 것 같더군요.

저녁 퇴근길. 강남역에서 지하철을 내렸습니다. 뭐 먹지? 혼자 물어봤다가 10분 고민 끝에 그냥 CU 들어가서 삼각김밥 집어든 경험, 있지 않습니까. 이게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닙니다. 뇌가 이미 당일치 결정 용량을 거의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퇴근 후 메뉴도 못 고르는 게 의지력 탓이 아닌 이유

조직심리 연구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임원이나 팀장급이 “일이 너무 복잡해서 결정을 못 하겠다”고 할 때, 진짜 문제는 복잡성이 아니라는 겁니다. 문제는 하루에 내려야 하는 결정의 수 자체입니다.

우리 뇌는 결정을 내릴 때마다 에너지를 씁니다. 쉬운 결정이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A를 택하면 B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처리해야 하니까요. 뇌 입장에서는 모든 선택이 일종의 리스크 평가 과정입니다. 그 규모가 크든 작든, 뇌는 매번 같은 회로를 돌립니다.

결정 용량은 유한합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채 하루를 보내면, 저녁이 되었을 때 “아무거나”가 최선의 답이 됩니다. 이게 게으름도 아니고 나약함도 아닙니다. 뇌가 보내는 과부하 신호입니다.

양말 하나를 고르는 것도 결정이다

이렇게 생각해보겠습니다.

아침에 양말을 고릅니다. (결정 1) 양말 서랍이 비어 있네, 세탁해야겠다 싶습니다. (결정 2) 세제가 있나? (결정 3) 퇴근길에 마트 들러야겠다. (결정 4) 두부도 사야 했는데. (결정 5)

이게 불과 10초 안에 일어납니다. 본인은 양말 하나 골랐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다섯 번 작동했습니다. (이게 은근히 압박이 되더군요.)

오전에는 그냥 지나칩니다. 아직 용량이 남아있으니까요. 그런데 오후 4시에 중요한 회의 안건을 결정해야 할 때, 본인도 모르게 이미 수백 번의 결정이 쌓인 상태입니다. 결정 피로는 조금씩 쌓이다가 어느 순간 한꺼번에 느껴집니다. 저녁 7시에 “나 왜 이렇게 멍하지?”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유독 힘들었던 어느 날을 돌이켜보면, 아침부터 루틴이 깨졌던 날인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엔 없던 결정을 하루 시작부터 강제로 하게 되었을 때, 오후 업무 용량을 갉아먹은 겁니다.

오바마가 매일 같은 옷을 입은 이유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 마크 저커버그, 빌 게이츠. 이들의 공통점 하나. 옷장에 같은 옷이 반복됩니다. 오바마의 경우 회색 또는 파란 정장만 입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으면 “그게 무슨 대단한 전략이냐”싶습니다. 그런데 포인트는 옷이 아닙니다. 아침에 내려야 하는 결정을 0개로 만드는 겁니다.

결정 용량이 유한하다면, 중요하지 않은 결정을 미리 제거해두는 게 낫습니다. 이 전략은 누구나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 전날 밤 다음 날 입을 옷 꺼내두기
  • 주중 점심 메뉴 월요일에 미리 정해두기 (회사 근처 가게 3곳 돌아가기)
  • 세제·화장지·치약 같은 생활 필수품은 정기 자동 배송 설정
  • 충전기는 항상 같은 자리에 두기 (위치 결정 자체를 없애기)
  • 아침 루틴을 15분 이내로 고정하기

이 행동들이 처음에는 별 차이를 못 느낍니다. 오전엔 어차피 용량이 충분하니까요. 효과는 저녁에 납니다. 판교에서 야근하다 나온 날 저녁, 메뉴 정하는 속도가 달라집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뇌는 그렇게 생겨먹은 겁니다.

진짜 위임은 업무가 아니라 결정권을 넘기는 것

팀장이나 리더 역할을 하시는 분들께 특히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위임을 “업무를 넘기는 것”으로 생각하면 위임 후에도 결정은 본인이 다 하게 됩니다. “민준이가 이걸 하고, 서연이가 저걸 하고”를 여전히 본인이 지시하고 있다면, 그건 위임이 아니라 마이크로매니징입니다. 진짜 위임은 결정 권한을 넘기는 겁니다. 어떻게 할지, 누가 할지를 팀원이 스스로 판단하게 두는 것입니다.

재택근무 중인 분들은 한 가지 더 주의하셔야 합니다. 오피스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차단되는 것들이 집에서는 그대로 노출됩니다. 세탁기를 돌릴지, 택배를 받을지, 냉장고를 열지. 이 결정들이 업무 시간에 끼어들면 업무용 결정 용량을 잠식합니다. 재택 환경과 결정 비용의 관계를 다룬 연구도 이 점을 지적합니다. 퇴근도 없고, 개인 결정과 업무 결정의 경계도 없으면, 저녁이 오기 전에 이미 방전됩니다.

결론은, 결정의 적은 복잡성이 아니라 횟수라는 겁니다. 오늘 저녁 무기력함이 느껴진다면, 의지력을 탓하지 마세요. 오늘 하루 뇌가 그만큼 일했다는 뜻입니다. 내일은 작은 것 하나만 루틴으로 만들어보세요. 양말 서랍 채워두는 것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뇌는 그 여유를 기억합니다.

Photo by Ron Lach on Pexels

김노마

🧠 뇌과학 ・ 습관연구가.
뇌과학과 행동경제학을 연구한다. 책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을 즐긴다. 자기계발과 라이프해킹 관련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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