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은 색대로, 움직임은 움직임대로, 명암은 명암대로. 눈은 서로 다른 시각 정보를 각각 독립된 통로로 처리한다는 게 오랜 정설이었다. 그런데 예일대 의대(Yale School of Medicine) 연구진이 이 정설을 뒤집는 발견을 내놓았다. 망막 안에서 이 통로들이 서로 몰래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사이언스데일리(ScienceDaily)에 따르면, 국제학술지 뉴런(Neuron)에 발표된 이번 연구는 이 ‘숨겨진 통신망’이 신호가 약할 때, 즉 어두운 곳에서 작은 물체를 볼 때 서로 힘을 합쳐 감지력을 끌어올린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색·명암·움직임, 원래 따로 처리된다고 믿어온 이유
시각 정보는 눈에 들어오는 즉시 색, 명암, 움직임, 형태 등 여러 특징으로 분리돼 각각의 통로를 따라 뇌로 전달된다. 이를 병렬 시각 처리(parallel visual processing)라 부른다. 여러 정보를 동시에 나눠 처리하기 때문에 뇌는 복잡한 장면도 순식간에 해석할 수 있다.
빛을 감지한 망막의 시세포(rods and cones)는 신호를 양극세포(bipolar cell)로 넘긴다. 이 단계에서 시각 정보는 주간 시야, 야간 시야, 색상, 명암, 형태 등 십여 개가 넘는 병렬 채널로 갈라진다. 연구자들은 이 채널들이 망막을 지나 뇌에 도달할 때까지 서로 거의 독립적으로 움직인다고 오랫동안 믿어왔다.
양극세포들이 몰래 신호를 주고받고 있었다
연구팀이 양극세포 사이의 미세한 접합부, 즉 시냅스를 정밀하게 들여다보자 예상 밖의 모습이 드러났다. 신경세포 간 통신에는 신경전달물질을 쓰는 화학적 시냅스와, 전류로 직접 신호를 전달하는 전기적 시냅스(갭 정션) 두 종류가 있는데, 양극세포는 주로 화학적 방식을 쓴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마우스와 인간의 망막을 모두 조사한 결과, 전기적 시냅스가 서로 분리돼 있다고 믿었던 채널 대부분을 이어주고 있었다. 연구팀이 양극세포 하나를 전기적으로 자극하자, 반응은 그 세포 하나에 그치지 않고 구름처럼 넓게 퍼져나갔다. 논문의 제1저자인 예일대 안과·시과학과 박사후연구원 야오 쉬(Yao Xue) 박사는 “각 채널이 자기만의 정보를 전달하면서도, 그 아래에서는 전기 회로로 서로 연결돼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이 통신망을 지휘하는 사령관, BC6 세포
연구팀은 이 통신망 속에서 신호 흐름을 계층적으로 조율하는 특정 세포 유형, 이른바 ‘BC6’를 찾아냈다. BC6에서 시작된 신호는 여러 시각 경로로 체계적으로 퍼져나가며 마치 지휘 계통처럼 작동했다.
교신저자인 마빈 L. 시어스 안과·시과학 석좌교수 지미 저우(Z. Jimmy Zhou) 박사는 “양극세포 유형들이 각자 자율적으로 움직인다고 여겨왔지만, 이 모든 유형 사이에서 위계질서를 만들어내는 ‘드라이버’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양극세포 하나를 자극했더니 수많은 양극세포가 함께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했다”고 덧붙였다.
신호가 약할수록 세포들이 힘을 합치는 이유
퇴근길 어두운 골목에서 발밑에 뭐가 있는지 유독 흐릿하게 보였던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이번 발견은 그 반대의 순간, 즉 캄캄한 곳에서도 작은 물체의 윤곽을 알아채는 원리를 설명해준다.
신호가 아주 약할 때 여러 채널이 각자 나눠 처리하면 남는 정보가 거의 없다. 이럴 때 통신망이 신호를 한데 모아준다. 공동교신저자인 예일대 안과·시과학과 연구원 이승훈(Seunghoon Lee) 박사는 “신호가 이미 너무 약한 상태에서 여러 채널로 나뉘면 각 채널이 처리할 정보가 얼마 남지 않는다”며 “이런 통합은 대비가 낮은 신호나 아주 작은 물체에서 나오는 신호를 감지할 때 특히 유용하다”고 설명했다. 야오 쉬 박사도 “세포들은 무작위로 협력하는 게 아니다. BC6라는 사령관이 이들을 이끌며 신호를 다음 단계로 전달한다”고 부연했다.
이번 기록은 온전한 상태의 망막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양극세포는 망막 깊숙이 있어 그동안은 망막을 얇게 잘라내야만 접근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원래의 회로가 흐트러지는 문제가 있었다. 연구팀은 이번에 마우스의 온전한 망막에 이중 패치클램프 기법을 적용했고, 이어 인간의 기증 망막 조직으로도 같은 실험을 성공시켰다. 온전한 인간 망막에서 이런 기록이 이뤄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황반변성·녹내장 연구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망막은 중추신경계의 일부다. 연구팀은 이번 발견이 시력뿐 아니라 뇌의 다른 신경망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데도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나아가 황반변성, 녹내장, 선천성 야맹증처럼 망막이 손상되는 질환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무엇보다 이번 연구는 특정 가설을 검증하려던 실험이 아니라, 호기심에서 출발한 관찰이 예상 밖의 메커니즘을 드러낸 사례다. 이승훈 박사는 “우리 실험은 특정 가설에서 시작하지 않았지만, 시각 시스템의 근본적인 처리 방식을 밝혀냈다”며 “호기심 기반 연구가 왜 중요한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눈이 어둠 속에서 무언가를 알아챌 때, 그 순간에도 우리가 미처 몰랐던 세포들의 협업이 조용히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참고자료
- Hidden network in the eye helps us see in low light, Yale study finds — ScienceDaily, 예일대 의대(Yale School of Medicine) 연구 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