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요즘 마음이 어때?”라고 물었을 때, 3초도 안 돼 “몰라”라고 답한 적 있나? 대부분 별생각 없이 뱉는 말이다. 근데 이게 그냥 대답이 아니라, 스스로를 탐색하지 못하게 막는 무의식적 방어기제라면 어떨까? 상담실에서 정말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모르겠어요”는 사실 대답이 아니라 행동이다
영국 철학자 J. L. 오스틴은 말이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고 봤다. 말은 그 자체로 어떤 행동을 수행한다. “미안해”라는 한마디가 관계를 실제로 바꿔놓는 것처럼, “약속할게”나 “받아들일게” 같은 말도 상대와 나 사이의 관계를 그 순간 바꿔버린다. 이게 바로 스피치 액트 이론이다.
이 원리를 “모르겠어요”에 적용하면 좀 무서워진다. 겉으로는 “답이 없다”는 뜻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질문은 더 들여다보지 않겠다”는 무의식적 선언일 수 있다는 거다. 상담사가 “그건 언제부터 그랬던 것 같아?” 같은 질문을 던지면, 5초도 채 고민하지 않고 “모르겠어요”부터 나오는 경우가 정말 흔하다. 질문을 곱씹기도 전에 문을 닫아버리는 거다.
어릴 때 들은 말이 지금 “몰라”를 만들었다
지금 내가 쓰는 “모르겠어요”는 사실 오래전부터 학습된 습관일 가능성이 크다. 어릴 때 “너는 참 예민하다”, “울지 좀 마” 같은 말을 자주 들었다면, 그 말이 감정을 대하는 태도 자체를 만들어버린다. 처음엔 그냥 스쳐 지나가는 잔소리였는데, 나중엔 “나는 원래 그런 애”라는 정체성으로 굳어지는 식이다.
실제로 부모와의 대화가 따뜻하고 열려 있었던 사람일수록 정서적 웰빙이 좋고, 반대로 적대적이거나 일관성 없는 대화를 겪은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Grey 외, 2022). 근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지금 내 안에서 제일 자주 울리는 목소리는 더 이상 부모님이 아니다. 내가 스스로에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는 말이다. “모르겠어요”도 그중 하나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본다 — “일단 받아주기”의 힘
즉흥극에는 “yes, and”라는 원칙이 있다. 한 명이 어떤 설정을 던지면, 상대는 일단 그걸 받아들이고 거기에 뭔가를 더한다. 만약 곧바로 부정해버리면 장면 자체가 무너진다.
자기 탐색도 비슷하다. 첫 번째로 떠오른 답이 정답일 필요는 없다. 그냥 그 답 하나를 방 안에 들이기만 하면 된다. 부정하듯 문을 닫아버리는 대신, “일단 이런 생각이 드네” 하고 잠깐 머물러 보는 것. 그게 시작이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이게 진짜 제일 어렵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모르겠어요”가 입에서 나오려는 순간, 아래 문구로 한 번만 바꿔보자.
-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 “굳이 짐작해보자면…”
- “마음 한구석에서는 왠지…”
- “이 질문에 대답하기 싫다는 걸 알아챘어”
- “아직 아무 생각도 안 떠올라. 잠깐 앉아서 생각해봐도 될까”
이 말들은 확신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냥 탐색을 멈추지 않게 해줄 뿐이다. 첫 생각이 결론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들여다볼 가치는 있는 재료다.
완벽한 답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모르겠어요” 대신 한 문장만 바꿔봐도, 닫혀 있던 질문 하나가 다시 열린다. 마침 주말이니까, 혼자 있는 시간에 이 문구들부터 한번 써볼 타이밍일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