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자도 피곤해요. 쉬면 오히려 더 불안해져요.” 상담실에서 자주 듣는 말이다. 이분들이 게으른 게 아니다. 의지력이 문제도 아니다. 사실 이건 신경계가 ‘경보 모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여기에 해당한다.
몸이 쉬지 못하는 이유 — 경계가 ‘기본값’이 됐다
신경계는 원래 위험을 감지하면 각성되고, 위험이 사라지면 이완된다. 그런데 오랫동안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이 시스템이 ‘각성 상태’를 기본값으로 학습한다. 근육이 항상 살짝 긴장되어 있고, 생각이 멈추지 않고, 쉬는 게 오히려 어색하다. 신경계 조절 전문 연구에 따르면, 신경계가 위험 신호를 계속 보내는 건 과거에 그게 실제로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이건 고장이 아니라 학습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본다 — 신경계는 망가진 게 아니라 배운 것이다
심리학에서 이 상태를 ‘과각성(hyperarousal)’ 또는 ‘신경계 조절 장애’ 라고 부른다. 중요한 건, 이 반응이 원래는 생존에 필요했다는 거다. 지속적인 긴장, 스트레스, 상실감… 그 시간 동안 신경계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걸 배웠다. 이제 그 위협이 사라졌어도 몸은 아직 그걸 모른다.
비유를 하나 들어보면 이렇다. 항상 긴장 속에서 일하던 사람이 갑자기 조용하고 여유 있는 환경으로 옮겨갔을 때, 오히려 더 불안해지는 경우가 있다. 평화가 낯설기 때문이다. 이건 이상한 게 아니다. 신경계가 아직 새로운 환경을 ‘안전하다’고 업데이트하지 못한 것이다. (이 비유를 처음 들었을 때 나도 좀 아팠다. 그 낯섦이 얼마나 외로운 감각인지.)

강렬한 노력 한 번보다 매일의 작은 반복이 훨씬 강하다
변화를 만들고 싶을 때 우리는 ‘결정적인 무언가’를 찾는다. 리트릿, 완벽한 루틴, 극적인 깨달음. 물론 그게 강렬하게 느껴지긴 한다. 근데 신경계를 재교육하는 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실제 변화는 위기 때가 아니라 평온한 순간의 반복에서 온다. 매일 5분 걷기, 식사할 때 맛에 집중하기, 불안하지 않을 때 숨 고르는 연습을 해두기. 이런 게 쌓이면 신경계가 ‘지금 여기는 안전하다’는 걸 서서히 학습한다. 극적인 변화보다 회복 시간이 짧아지고, 긴장 상태가 덜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게 진짜 진전이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게 있다. 이 과정은 개를 훈련할 때와 비슷하다. 원하지 않는 행동을 억제하려 하면 오히려 더 강해진다. 원하는 반응을 반복적으로 보상하면 자연스럽게 그쪽이 강해진다. 신경계도 마찬가지다. 이완을 억지로 명령하는 게 아니라, 이완된 상태를 자꾸 경험시켜줘야 한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 평온할 때 이완 연습하기 — 심호흡, 접지(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 느끼기) 같은 이완 기법은 불안할 때 꺼내 쓰는 비상도구가 아니다. 긴장이 없을 때 반복해야 신경계에 각인된다.
- 감각에 집중하는 5분 — 차 한 잔 마실 때 온도와 향에만 집중해보기. 뇌에 “지금 이 순간, 나는 괜찮다”는 신호를 준다. 거창할 필요 없다. (사실 이게 제일 어렵다. ‘이걸로 되겠어?’라는 생각을 끄는 것 자체가 훈련이다.)
이럴 땐 전문가와 함께
혼자 하기 어렵다면 전문 상담을 고려해볼 시점이다. 특히 아래에 해당한다면.
- 만성 긴장과 피로가 3개월 이상 지속될 때
- 수면, 식욕, 집중력에 동시다발적 문제가 생겼을 때
-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이나 공황 증상이 있을 때
사회불안, OCD 등 특정 패턴을 가진 경우엔 그에 맞는 접근법이 따로 있다. 적합한 치료는 개인의 속도를 존중하고, 서두르지 않는다. 상담은 스스로 해결하지 못해서 가는 게 아니다. 더 빠른 길을 선택하는 거다.
신경계 과각성은 나쁜 사람의 증거가 아니다. 오랫동안 어려운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 버텨온 증거다. 바꾸려면 억지로 누르는 게 아니라, 조금씩 ‘지금은 괜찮다’는 걸 몸에 알려주는 게 필요하다. 마침 오늘 이 글을 읽었으니, 지금이 시작하기 딱 좋은 타이밍일지도. (아주 작게 시작해도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