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도 과하면 독? 격렬한 운동이 면역력에 미치는 숨겨진 영향

건강한 사람일수록 감기에 더 자주 걸릴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되나? 정녕 운동은 우리를 배신하는 걸까?

지난 여름, 미국 태평양 북서부 국립연구소의 연구실에서 흥미로운 실험이 진행되었다. 11명의 소방관들이 20킬로그램의 장비를 메고 언덕길을 45분간 뛰어올라갔다. 평소 같으면 그냥 훈련으로 끝났을 일이지만, 이번엔 달랐다. 연구진들이 운동 전후 소방관들의 혈장, 소변, 타액을 채취해 4,700여 개의 분자를 분석했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운동은 면역력을 높인다’는 공식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격렬한 운동 직후, 소방관들의 몸속에서는 염증 관련 분자들이 감소하고, 혈관을 확장시키는 오피오르핀이라는 물질이 증가했다.

연구를 주도한 에르네스토 나카야수 박사는 “아주 건강한 사람들이 격렬한 운동 직후 바이러스성 호흡기 감염에 더 취약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운동으로 몸을 단련한 사람들이 오히려 감기에 더 자주 걸릴 수 있다는 역설적 상황이 과학적으로 입증된 셈이다.

운동과 면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

사실 운동과 면역력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다. 1990년대부터 스포츠 과학자들은 운동 강도와 면역력 사이에 ‘J자 곡선’ 이론을 제시해왔다. 이 이론에 따르면, 적당한 운동은 면역력을 높이지만, 운동 강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오히려 면역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1980년대 로스앤젤레스 마라톤 대회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대회 후 1주일 동안 상부 호흡기 감염률이 일반인보다 6배 높았다. 올림픽 선수들이 시합 직후 감기에 자주 걸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정말 운동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요인들 때문인지는 여전히 논란거리였다. 마라톤 선수들의 경우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 수면 부족, 영양 불균형 등 다양한 변수들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몸속에서 벌어지는 미세한 전투

그렇다면 격렬한 운동 후 우리 몸에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연구진들은 소방관들의 타액에서 중요한 단서를 찾았다. 운동 후 구강 내 미생물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항균 펩타이드가 증가했지만, 정작 대장균 증식을 억제하는 효과는 미미했다.

이건 마치 경보 시스템은 울리고 있지만 실제 방어력은 떨어진 상태와 같다. 염증 반응을 담당하는 분자들이 감소하면서 바이러스나 세균의 침입에 대한 1차 방어선이 약화된 것이다.

흥미로운 부분은 혈관 확장 물질인 오피오르핀의 증가다. 연구진들은 이 물질이 운동 중 근육으로의 산소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분비되지만, 동시에 면역 체계의 균형을 깨뜨릴 수 있다고 추정했다.

30년 만에 뒤집힌 통념

사실 운동과 면역력에 대한 기존 이론은 2018년 크게 뒤집혔다. 영국 버밍햄 대학교와 킹스 칼리지 런던의 공동 연구팀이 55세에서 79세의 아마추어 사이클 선수 125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격렬한 운동이 면역 체계를 파괴한다”는 기존 통념이 잘못되었다고 발표했다.

연구팀의 존 캠벨 박사는 “실제로 운동 후에 면역 체계가 향상되었다는 증거가 있다”며 “운동으로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면역 반응이 개선되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 연구와 소방관 연구는 서로 모순되는 걸까?

핵심은 시간과 강도에 있다. 규칙적인 운동은 장기적으로 면역력을 높이지만, 극도로 격렬한 운동은 단기적으로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 마치 근육이 운동 직후 일시적으로 약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더 강해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그렇다면 얼마나 운동해야 할까?

결국 핵심은 강도 조절이다. 미국 스포츠 의학회에서는 성인 기준으로 주 150분의 중강도 운동 또는 주 75분의 고강도 운동을 권장한다. 여기서 중강도는 운동하면서 대화가 가능한 정도, 고강도는 운동 중 말하기 어려운 정도를 의미한다.

문제는 90분 이상의 고강도 운동이다. 한국 체육과학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고강도 운동을 90분 이상 지속하면 1~2시간 동안 면역 세포의 숫자와 기능이 현저히 떨어진다. 동시에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도 증가해 면역 기능을 더욱 억제한다.

특히 마라톤이나 트라이애슬론 같은 극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주의가 필요하다. 이들은 운동 후 3~72시간 동안 면역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오픈 윈도우’ 현상을 경험할 수 있다.

현실적인 대안은 무엇인가?

그럼 운동을 아예 하지 말아야 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핵심은 똑똑하게 운동하는 것이다.

첫 번째로, 점진적 강도 증가가 중요하다. 갑자기 고강도 운동을 시작하기보다는 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서서히 강도를 높여가야 한다.

두 번째로, 회복 시간을 충분히 갖는 것이다. 고강도 운동 후에는 최소 24~48시간의 회복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 동안 적절한 영양 섭취와 수면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개인의 컨디션을 고려해야 한다. 이미 스트레스가 많거나 수면이 부족한 상태라면 운동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현명하다.

소방관 연구가 남긴 과제

소방관 연구는 비록 11명이라는 작은 표본으로 진행되었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운동은 만능이 아니며, 과도한 운동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연구에도 한계가 있다. 소방관들은 화재 현장에서 각종 유독 물질에 노출되는 특수한 직업군이고, 연구 대상도 모두 건강한 남성들이었다. 따라서 일반인에게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연구를 주도한 크리스틴 버넘-존슨 박사는 “우리는 신체 소진의 초기 단계에서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응급 구조원, 운동선수, 군인들의 격렬한 운동 위험을 줄이는 방법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운동도 약처럼

결국 운동도 약과 같다. 적당히 먹으면 약이 되지만, 과하면 독이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운동의 양적 확대가 아니라 질적 향상이다.

매일 2시간씩 헬스장에서 죽어라고 운동하는 것보다, 주 3~4회 적당한 강도로 꾸준히 운동하는 것이 면역력 향상에 더 효과적이다. 특히 격렬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은 운동 후 충분한 휴식과 영양 섭취, 그리고 컨디션 관리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

운동은 여전히 건강의 핵심이다. 다만 ‘더 많이, 더 세게’가 아니라 ‘더 똑똑하게’를 목표로 해야 한다는 점을 잊지 말자. 몸이 보내는 신호에 귀 기울이고, 적절한 운동 강도를 찾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건강 관리의 시작이다.

참고자료

찬호

교육을 전공하고 현재 피트니스 쪽에서 일한다. 흥미로운 콘텐츠를 소개할 때 제일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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