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즐겨 읽는다고 하면 꼭 이런 말을 듣는다. “현실도피 아니야?” 그런데 Psychology Today에 발표된 인지심리학 연구는 이 상식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소설을 읽는 건 현실에서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만드는 가장 직접적인 공감 훈련이다.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로 더 깊이 들어가는 방법이라는 거다.
소설을 읽다가 눈물이 나는 이유
책을 읽다가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던 적 있지 않나? 나한테 일어난 일도 아닌데, 주인공의 감정이 몸에 와 닿는 그 순간. 이건 이상한 반응이 아니다.
숙련된 소설가들은 독자의 상상력을 유도하기 위해 시각적 단서와 신체감각(somatosensory) 단서를 의도적으로 결합한다. 주인공이 차가운 빗속을 걷는 장면을 읽을 때, 독자의 뇌는 그 감각을 거의 실제와 유사하게 재현한다. 읽는 게 아니라 경험하는 것에 가깝다. 연구에서는 이야기 몰입도(absorption)와 독자의 신체적 감정 반응 사이에 유의미한 양의 상관관계가 확인됐다. 몸이 먼저 공감한다는 거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독자들은 작가가 제시한 것보다 더 능동적으로 상상한다. 주인공이 인식하지 못하는 부분까지 독자 스스로 채워낸다는 것. 독서는 수동적인 수용이 아니라, 뇌가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이다. (이걸 알고 나서 예전에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던 게 좀 아쉬워졌다. 그 감각들을 다 건너뛴 셈이니까.)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본다 — 다중 관점 상상력
심리학에서는 이걸 ‘관점 전환(perspective-taking)’이라고 부른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 세상을 보는 능력인데, 소설이 이걸 특별하게 훈련시키는 이유가 있다.
소설에서는 여러 인물의 관점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 주인공이 모르는 걸 독자는 안다. 악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조연이 주인공을 어떻게 보는지 — 현실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시점이다. 이 다중 관점의 경험이 반복되면, 뇌는 ‘한 상황에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걸 학습하게 된다.
비소설(non-fiction)을 읽는 것과 소설을 읽는 것은 다른 종류의 훈련이다. 정보를 아는 것과, 그 상황을 직접 경험하는 것의 차이라고 보면 된다. 심리학 연구들은 공통적으로 소설 독서가 공감 능력, 특히 타인의 감정 상태를 추론하는 능력(Theory of Mind)에 더 효과적이라는 결론을 냈다.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의 차이가 그만큼 크다.
분열된 세상에서 소설이 하는 일
요즘처럼 정치적으로도, 세대 간에도 ‘내 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분위기에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능력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이 연구가 특히 주목한 부분이 바로 여기다.
소설을 통한 다중 관점 경험이 현실에서도 낯선 관점을 이해하는 근육을 키운다는 것. 동의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능력. 이건 공감 자체보다 더 근본적인 거다. 상대를 승인하는 게 아니라, 왜 그 사람이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납득할 수 있게 되는 것.
근데 여기서 재밌는 게 있다. 이 효과는 단순히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 아는 것보다, 그 배경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 소설을 읽는 것에서 훨씬 강하게 나타난다. 분열의 시대에 소설이 하는 일이 생각보다 꽤 조용하고 꽤 깊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거창하게 독서 모임을 시작하거나 두꺼운 책을 살 필요 없다. 두 가지만.
조연 캐릭터에게도 집중해서 읽기. 주인공만 따라가다 보면 결국 한 관점에만 머물게 된다. “이 사람은 왜 이런 선택을 했지?”라고 잠깐 멈추고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관점 전환 훈련이 된다. 실제로 이 습관을 들이면 현실 대화에서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는’ 속도가 달라진다.
속도를 늦추고 감각에 집중하기. 빨리 결말을 알겠다는 마음을 조금 내려놓으면 이야기 몰입이 깊어진다. 그리고 그 몰입이 깊어질수록 공감 훈련의 효과도 커진다. 장면의 온도, 냄새, 소리에 잠깐 머무는 것만으로도 뇌가 그 경험을 더 깊이 처리한다. (결말 스포를 먼저 찾아보는 습관이 있다면… 이건 좀 재고해볼 만하다.)
소설 읽기는 결국 거창한 게 아니다. 지금 책상 위에 소설 한 권이 있다면, 오늘 저녁 딱 20분만 다시 펼쳐보자. 마침 주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지금이 완벽한 타이밍일지도. 처음에는 그냥 이야기가 재미있겠지만, 어느 순간 나와 다른 누군가의 마음이 조금씩 읽히기 시작할 거다. 소설은 현실 도피가 아니다. 소설은 현실 연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