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 에이전시의 진짜 고객은 당신이 아닙니다

마케팅 부사장으로 취임한 첫 해, 저는 제가 완벽히 통제한다고 믿었던 홍보 캠페인을 망쳤습니다. 엠바고를 걸어둔 독점 기사가 약속된 날짜보다 며칠 앞서 일방적으로 보도됐습니다. 분노한 저는 PR 에이전시에게 바로 전화했습니다. “그 매체엔 다시는 우리 기사 안 줍니다. 그렇게 전달하세요.” PR 에이전시 CEO는 수화기 너머로 조용히 웃었을 겁니다. 저는 한참 후에야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외부 에이전시를 고용하면 당신은 그들의 고객이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닌데요. 실리콘밸리의 전설적 창업자이자 스탠퍼드 교수인 스티브 블랭크는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 경험을 솔직하게 털어놓습니다. 스타트업을 운영한다면 반드시 새겨볼 이야기입니다.

에이전시가 진짜 지키는 관계는 따로 있다

PR 에이전시의 비즈니스 모델은 단순한 단일 시장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회사와 에이전시의 1:1 계약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다면 시장(multi-sided market)입니다. 에이전시가 수십 년에 걸쳐 쌓아온 가장 소중한 자산은 언론사, 기자, 미디어 관계자들과의 장기적 신뢰입니다.

WSJ이나 NYT 기자와의 관계는 특정 클라이언트가 계약을 해지해도 남아 있어야 하는 자산이기 때문인데요. 그러니 당신이 아무리 분노해도 에이전시는 그 기자에게 강경한 항의를 전달하지 않습니다.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습니다. 당신의 이익보다 미디어와의 관계가 훨씬 장기적이고 중요한 것이지요.

당신은 여러 클라이언트 중 하나다

더 냉정한 현실이 있습니다. 에이전시 입장에서 당신 회사는 수십 개 클라이언트 중 하나일 뿐이고, 스타트업이라면 규모도 작은 편에 속합니다. 만약 당신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하거나 불가능한 성과를 요구한다면, 에이전시는 당신을 다른 클라이언트로 교체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로비스트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쉬운데요. 로비스트는 정부 관료와의 관계를 당신과의 계약보다 훨씬 소중히 여깁니다. 건축 사무소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공사, 인허가 담당자와의 오랜 관계가 핵심 자산이기 때문에 클라이언트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구조입니다. 이 구조는 거의 모든 외부 서비스 제공자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됩니다.

진짜 실수: 지식을 통째로 위탁했다는 것

블랭크가 가장 뼈아프게 회고하는 실수는 에이전시의 배신이 아닙니다. 그것은 일본 유통·제조 구조를 파악할 완벽한 기회를 날린 것이었습니다. 그는 세계 최고 수준의 컨설턴트를 고용해 일본 파트너십을 성공적으로 구축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성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그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습니다. 컨설턴트가 가진 현지 네트워크, 협상 노하우, 산업 구조에 대한 이해가 회사 내부로 이전되지 않았던 것인데요. 서비스를 구매했지만 지식은 위탁해버린 셈이었습니다. 계약이 끝나자 그 자산은 모두 컨설턴트의 것으로 돌아갔습니다. 외부 벤더와 일할 때는 서비스를 받는 동시에 그 지식을 내재화하는 것이 핵심 과제입니다.

외부 의존의 끝, AI 에이전트가 바꿀 것들

이 모든 구조는 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릴 것입니다. 블랭크는 PR이 현재 형태로는 곧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AI가 언론 관계를 일부 대체하고, 콘텐츠 생산과 배포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하면 다면 시장의 이점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창업자 입장에서 이 변화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외부에 위탁했던 PR, 마케팅, 유통 지식을 직접 내재화할 수 있는 도구가 생기는 것이고, 에이전시와의 관계에서 더 대등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다면 시장에서 종속적 위치에 있던 클라이언트가 구조 자체를 재설계할 기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은데요.

  1. 에이전시와 외부 컨설턴트는 당신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의 가장 소중한 자산은 미디어·관료·업계와의 장기 관계다.
  2. 당신은 여러 클라이언트 중 하나다. 무리한 요구는 관계의 교체로 이어질 수 있다.
  3. 지식과 네트워크를 외부에만 맡기는 것은 전략적 실수다. 함께 일하면서 내부로 가져와야 한다.
  4. AI 에이전트 시대는 이 구조를 바꿀 것이다. 변화를 기회로 읽어야 한다.

외부 에이전시나 컨설턴트를 활용할 때, 이들이 어떤 생태계 안에 있는지를 먼저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반드시 배움이 내 것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이는 저만의 이야기는 아닌 듯합니다.

최현우

IT 기업에서 일하다가 현재는 작은 🚀스타트업 창업 3년차. 인생모토 = 불가능이란 환상에 빠지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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