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그냥 더 나은 삶을 기다리고 있는 것뿐이에요.”
상담실에서 진짜 자주 듣는 말이다. 더 좋은 직장, 더 완벽한 연인, 더 여유로운 일상. 언젠간 그런 삶이 올 거라는 믿음을 가진 채 오늘 이 순간을 잠시 ‘대기’ 상태로 두는 것이다. 근데 여기서 진짜 문제가 시작된다. 이 기다림이 반복적인 공상(daydream) 속에서 굳어지기 시작하면, 뇌는 그 상상을 ‘곧 이뤄질 미래’처럼 처리하기 시작한다. 오늘의 삶은 그 사이에서 조용히 빠져나간다.
공상이 왜 그렇게 실감 나는가
가수가 되는 상상을 해본 적 있지 않나? 그 상상 속에는 악플도 없고, 체력 고갈도 없고, 무대 긴장도 없다. 팬들의 환호와 스포트라이트만 있다. 공상은 언제나 현실에서 가장 불편한 부분을 조용히 삭제한다.
Psychology Today에 따르면, 특히 생생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이 공상이 단순한 ‘탈출구’가 아니라 ‘예상되는 미래’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일어날 일을 앞서 경험하는 것처럼. 그러니 왜 지금 당장 뭔가를 시작하겠는가. 어차피 미래에 더 좋은 버전의 내가 더 좋은 상황에서 시작할 텐데.
이걸 심리학에서는 ‘말어댑티브 데이드리밍(Maladaptive Daydreaming)’, 즉 비적응적 공상이라고 부른다. 그냥 잠깐 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몇 시간씩 공상에 빠져들고, 현실 관계나 일을 미루게 되는 수준이 됐을 때 그렇게 부른다.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본다
비적응적 공상의 뿌리에는 뚜렷한 패턴이 있다. 공상을 지속시키는 5가지 인지 왜곡이다.
1. 과잉일반화 — “저 사람이 해냈으니 나도 당연히 할 수 있다.” 한 가지 성공 사례를 자기 상황에 그대로 붙여넣는다.
2. 흑백논리 —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의미 없어.” 지금의 삶은 잠정적이고, 이상적인 조건이 갖춰져야 비로소 진짜 삶이 시작된다고 믿는다.
3. 정신적 필터링 — 공상 속 삶의 좋은 면만 보고 힘든 부분은 자동으로 걸러낸다. 결과만 있고 과정은 없는 몽타주다.
4. 마음 읽기 — “내 재능을 알아볼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아직 만나지도 않은 사람의 반응을 이미 확신한다.
5. 점치기 — “언젠간 반드시 이렇게 될 거야.” 이 믿음이 공상을 포기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연료다.
이 왜곡들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 지금 이 순간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삶에 베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공상을 더 크게 키운다
근데 여기서 재밌는 게 있다. 이 공상이 개인 심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데이팅 앱을 생각해보자. 스와이프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더 좋은 사람이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선택지가 많을수록 오히려 지금 있는 관계의 만족도가 낮아지는 현상이 반복적으로 관찰됐다. 앱이 만들어내는 무한한 선택지의 환상이 현실 관계를 ‘잠정적’으로 만든다.
직장 불만족도 비슷하다. “나는 여기 있을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 이 생각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그게 실제 행동이나 변화 없이 공상의 형태로만 반복된다면, 지금 내 역량을 키울 에너지가 전부 ‘언젠가의 다른 나’에게로 흘러간다.
오늘 당장 해볼 수 있는 것
공상을 멈추려고 하면 오히려 더 강해진다(제발 공상하지 말자 → 자꾸 공상함). 대신 이 방향을 시도해보자.
존경하는 인물의 전기를 읽어라. Psychology Today 칼럼에서도 강조한 방법이다. 성공한 사람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삶도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갈등이 있었고, 실수가 있었고, 원하지 않던 순간들이 가득했다. 판타지는 언제나 현실보다 좋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판타지의 힘을 꺼뜨리는 방법이기도 하다.
지금 내 삶에서 가치 있는 것 세 가지를 써보라. 작아도 된다. 매일 마시는 커피 한 잔, 퇴근 후 산책, 연락이 닿는 친구 한 명. 이상적인 삶에서 필터링되어 없어지는 것들이다. 현재에 닻을 내리는 가장 단순한 방법이다.
더 나아지고 싶은 마음은 건강하다. 그 욕망이 문제가 아니다. 다만 욕망 속에 길을 잃는 것은 다르다. 마침 지금 이 글을 읽으면서 “내 공상이 좀 크지 않나?” 하는 질문이 생겼다면, 그 질문이 이미 시작점이다. 지금이 딱 좋은 타이밍일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