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해가 났다. 두 이웃은 같은 홍수를 겪었다. 집이 잠겼고, 피난을 갔으며, 재산 피해도 비슷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그날을 “평생 잊지 못할 트라우마”로 기억했고, 다른 한 사람은 “묘하게 즐거운 기억”이라고 했다. 같은 사건이었다. 왜 기억의 감정은 완전히 달랐을까.
왜 나쁜 기억은 더 선명하게 남을까
누구나 경험합니다. 칭찬 열 마디보다 비판 한 마디가 오래갑니다. 즐거운 여행 사흘보다 그날 있었던 작은 다툼이 더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내가 예민한 탓인가” 싶지만, 그게 아닙니다.
뇌가 원래 그렇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뇌과학자들은 이걸 ‘부정성 편향(negativity bias)’이라고 부릅니다. 긍정적인 경험보다 부정적인 경험에 더 크게 반응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경향입니다. 이 현상이 왜 생기는지, 뇌 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동안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구체적인 메커니즘이 밝혀졌습니다. 기억에 감정 태그를 붙이는 분자 스위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요.
뇌의 기본값은 ‘위험’이다
2022년, 살크 연구소(Salk Institute)의 케이 타이(Kay Tye) 교수팀은 기억에 감정이 붙는 과정을 네이처(Nature)에 발표했습니다.
뇌는 어떤 경험을 하면 자동으로 감정 태그를 붙입니다. “이건 좋은 것” 또는 “이건 피해야 할 것.” 이 과정을 ‘밸런스 배정(valence assignment)’이라고 합니다. 다음에 비슷한 상황이 오면 다가갈지 피할지 판단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뇌가 생존을 위해 진화시킨 핵심 기능입니다.
케이 타이 교수는 이미 2016년에 편도체(basolateral amygdala, BLA) 안에 두 종류의 뉴런이 따로 존재한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한 집단은 긍정 감정을 처리하고, 다른 집단은 부정 감정을 처리합니다. 두 회로는 철도 레일처럼 완전히 분리되어 평행으로 달립니다.
그런데 의문이 남았습니다. 같은 경험인데도 어떤 사람은 긍정 레일로, 어떤 사람은 부정 레일로 빠지는 건 왜일까. “우리는 두 갈래 레일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신호가 스위치를 조작하는지는 몰랐습니다.” 타이 교수의 말입니다.
감정 기억을 결정하는 두 갈래 철도
이번 연구에서 연구팀은 마침내 그 스위치를 찾아냈습니다. 바로 뉴로텐신(neurotensin)이라는 신경펩타이드입니다.
연구팀은 CRISPR 유전자 편집으로 편도체에서 뉴로텐신 유전자를 제거했습니다. 그러자 쥐에게 흥미로운 변화가 생겼습니다.
달콤한 맛과 특정 소리를 연결하는 긍정 학습이 아예 사라졌습니다. 긍정 레일이 꺼진 겁니다. 그런데 부정 학습은 오히려 강해졌습니다. 쓴맛과의 연관을 더 빠르고 더 강하게 기억했습니다.
즉, 뉴로텐신이 없으면 뇌는 오직 부정 레일만 씁니다. 긍정 경험을 기억하는 스위치 자체가 꺼지는 거죠. 반대로 뉴로텐신 수치를 높이자 긍정 학습이 강화되고 부정 반응이 줄어들었습니다.
공동 저자 하오 리(Hao Li)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스위치를 조작해서 긍정 또는 부정 학습을 켜거나 끌 수 있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단순한 발견이 아닙니다. 감정 기억의 근본 작동 원리를 처음으로 분자 수준에서 특정한 겁니다.
긍정 기억으로 전환하는 분자 스위치
이 발견이 중요한 이유는 PTSD, 불안장애, 우울증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으로 부정 편향이 강한 사람들은 뉴로텐신 신호 체계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연구팀은 이 경로에서 새로운 치료 타깃을 찾겠다고 밝혔습니다.
타이 교수는 말합니다. “뇌의 기본 상태는 공포 쪽으로 편향되어 있습니다. 위험한 상황을 피하도록 돕는 진화적 전략이죠.” 인류가 맹수와 독소를 피해 살아남으려면, 나쁜 경험을 더 강하게 기억해야 했습니다. 부정이 기본값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긍정 레일은 추가 신호, 즉 뉴로텐신이 켜줘야 비로소 활성화됩니다.
물론 지금 당장 뉴로텐신을 조절하는 약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게 바로 나온다면 노벨상이겠죠.) 연구팀도 “뇌에서 뉴로텐신이 어떻게 방출되는지, 다른 경로는 무엇인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연구가 분명히 알려주는 게 있습니다. 나쁜 기억이 자꾸 떠오르는 게 의지력 부족 탓이 아니라는 겁니다. 뇌 회로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됐습니다. 같은 홍수를 겪고도 한 사람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긴 건, 그날 그 경험에서 보람을 찾는 방식으로 뇌가 반응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격 차이가 아닙니다.
결론은, 나쁜 기억이 더 오래 선명한 건 당신이 예민한 탓이 아니라는 겁니다. 뇌가 원래 그렇습니다. 기본값이 공포입니다. 그걸 알고 나면 적어도 자책하는 에너지는 아낄 수 있습니다. 뭐 어쩌겠습니까, 뇌가 그러겠다는데요.






